첫째는 1425년 종묘 제례에서 일어난 '계단 추락 사고'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식을 주관하던 허조는 술잔을 올리고 내려오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모두가 그의 실수를 탓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세종의 첫마디는 달랐다. "허 판서, 다치지 않았는가." 세종은 책임을 묻기보다 사람을 먼저 살폈다. 이어 "계단을 넓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 실수한 사람을 탓하기보다 사고를 만든 구조를 고친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세종의 태도는 허조에게 왕에 대한 깊은 신뢰를 심어 주었을 것이다. 이후 허조는 평생 "국가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自以 國家之事 爲己任 자이 국가지사 위기임]"는 평가를 받는다.
둘째는 태종의 신임이었다. 태종은 허조를 "나의 주석(柱石)"이자 "참된 재상[眞宰相]"이라 부르며 깊이 신뢰했다. 그러나 허조 역시 처음부터 강직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김종남 사건과 목인해 사건을 겪으며 그는 아무리 간쟁이 중요해도 군주의 뜻을 거스르기만 해서는 국정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점은 수령고소금지법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허조는 끝까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왕이 최종 결정을 내리자 "내 뜻과는 다르지만 거의 중용을 얻었다[庶可得中]"며 승복했다. 직언의 목적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일이 더 바르게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셋째는 세종이 즉위 초부터 보여 준 국정 운영 원칙이었다. 세종은 1419년 허조와의 논의에서 "인재를 얻었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나면 맡기지 말라[任則勿疑 疑則勿任 임즉물의 의즉물임]"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신을 선발했으면 책임을 맡겨 성과를 내게 해야 하며, 임금이 자잘한 일까지 모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허조의 생각은 이후 세종 국정 운영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허조가 세종시대에 남긴 가장 큰 공은 두 가지였다. 인재를 선발하고 보호하는 인재경영의 기틀을 세운 것과, 건설적 비판자로서 정책의 허점을 미리 짚고 대안을 모색하게 한 것이다. ‘초뷰카(hyper VUCA) 시대’인 오늘날 이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최고경영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기업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많은 실패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방향만 바라보는 '집단사고'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허조가 맡았던 '집단착각 깨뜨리기'는 오늘날 모든 조직이 다시 주목해야 할 리더십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소개한 덴마크의 사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 정부와 공직자들은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에 침묵하지 않았다. "반유대인 조치가 시행되면 즉시 사임하겠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이러한 원칙 있는 저항은 나치 군인들마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7,800여 명의 덴마크 유대인 가운데 독일군에 체포된 사람은 477명에 그쳤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원칙에 기초한 저항에 맞닥뜨리자 그들의 강인성은 태양 아래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고 평가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직언이 조직의 분위기를 바꾸고, 조직의 분위기가 다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세종이 허조를 곁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리더는 언제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다른 생각을 말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조직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반대 의견이 많은 때가 아니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업과 공공조직에서도 진정한 경쟁력은 뛰어난 전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칙에 따라 사람을 뽑고, 다른 의견을 끝까지 들으며, 직언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조직만이 큰 실패를 피하고 오래 살아남는다. 좋은 리더는 정답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의견을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