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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33호] 사람을 뽑고, 리더를 바로잡다 ― 세종시대 대쪽재상 허조의 두 가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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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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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승 허판서.
세종시대를 이끈 두 명의 재상, 영의정 황희(1363~1452)와 이조판서(훗날 좌의정) 허조(1369~1439)를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성품과 역할은 달랐지만 서로의 장점을 보완하며 세종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했다. 허조의 후손 가문에서 펴낸 『금호세고』에는 "조선의 명재상을 말할 때 사람들은 '황·허'를 함께 꼽는다. 황희는 넓은 도량[器量 기량]으로, 허조는 예법과 실천[禮行 예행]으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이어 허조의 자손들이 3대에 걸쳐 명성을 떨친 점을 내세우며 황희 가문과 은근한 경쟁심을 드러내기도 한다(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 『금호세고』, 11쪽).
그러나 현대 지식인들의 허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냉정하다. 그가 수령고소금지법과 주인고소금지법의 입안을 주도했다는 이유에서다. 허조는 1420년(세종 2) 백성과 아전이 수령과 관리를 고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제안했고,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어 1422년(세종 4)에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도 마련하였다.

전자, 즉 수령고소금지법에 대해 강명관 교수는 "민중의 입을 틀어막고 수령의 자의성을 보장한 일대 사건"이라고 평가했으며(『한글, 불편한 진실』, 98쪽), 후자, 즉 주인고소금지법에 대해서 이영훈 교수는 이 법 이후 "노비는 주인의 불법과 악행에 저항할 법적 능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56쪽).

이러한 평가만 보면 허조는 국가 권력과 양반 기득권을 대변한 수구적 관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당시의 정치 현실을 함께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왜 백성과 아전의 수령 고소를 제한하려 했고, 왜 노비의 주인 고소를 금지하려 했을까. 그 배경과 문제의식을 먼저 살핀 뒤 평가해도 늦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는 허조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오늘의 잣대로만 재단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후 맥락을 제거하고 “말을 바꾸어[變辭 변사 – 세종이 정창손을 비판한 표현] ”일부만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연구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기록의 일부를 변형하거나 전후 맥락을 생략한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다른 글(문화일보, 2018.5.23·30; 「세종은 정말로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리더십에세이, 2025.11.18)에서 충분히 논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이 글에서는 세종시대 국가경영에서 허조가 맡았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역사 속 인물들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분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마주한 선택지와 그 선택,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결과까지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비로소 오늘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세종시대 허조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조선식 국가 질서를 정비한 국가의례의 설계자, 인재를 선발하고 보호한 '조선 최고의 이조판서', 그리고 세종 정부의 건설적 비판자로서 열린 소통 문화를 이끈 인물이다. 이 글에서는 그 가운데 오늘날에도 특히 시사점이 큰 두 가지, 곧 인재경영과 건설적 비판자로서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조의 책임자로서 수많은 인재를 발탁한 일이다. 『금호세고』에 따르면 허조는 일곱 차례 과거시험을 주관하며 안숭선과 신숙주 등을 선발하였다. 또한 세종이 비밀리에 신하들의 됨됨이를 물으면 여러 인재를 추천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훗날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48쪽).

다음으로, 허조는 인재를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인재의 선발 못지않게 유능한 관직자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허조의 생각이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거나 국가정책을 비판하다가 곤경에 처한 관리들을 보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곤 했다. 수령고소금지법을 제안해 법제화시킨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고을 수령의 민사법 판결에 대해 관내 백성들의 고소를 금지한 이 법안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퇴보적인’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허조는 힘들여 기르고 까다롭게 선발한 인재가 “간사한 자들의 모함에 빠져” 희생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손실이라고 보았다. 사소한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들어 관리를 파면하려는 감찰 관리를 찾아간 허조가 “혹시 잘못이 있다 하여도 어찌 급하게 죄줄 수 있겠는가”라면서 인재를 변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공은 세종 정부의 인사 시스템을 정비한 점이다. 그는 인재를 가려내고[測人 측인], 교육하며[敎人 교인], 적재적소에 등용하는[選人 선인] 용인 체계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였다. 실록은 "이조판서로서 전후 거의 10년 동안 인재선발을 맡았는데, 관직에 결원이 생기면 반드시 인사 담당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간택(揀擇)하게 하고, 다시 함께 평론(評論)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衆議 중의]이 모인 뒤에야 임명하였다"고 전한다(세종실록 21년 12월 28일).
내가 보기에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지막 인재 선발이다. 아무리 사람의 자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훌륭하게 교육했더라도, 적합하지 않은 자리에 배치하면 용인의 효과는 사라진다. 인재의 변별과 교육이 필요조건이라면, 적재적소의 배치는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 충분조건을 충족시키는 첫 번째 원칙은 '일 중심의 선발'이다. 세종시대 공직자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말은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일을 위하여 사람을 뽑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 일을 고르는 게 아니다”는 것은 제대로 된 나라나 조직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1426년(세종 8)에는 업무가 끝났는데도 인력과 예산을 계속 쓰던 관청 31곳을 폐지했고, 1436년에는 집현전 스스로 "정원이 지나치게 많다"며 정원의 1/3 이상을 줄였다.
허조가 '일 중심의 선발'을 얼마나 철저히 실천했는지는 세종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어느 날 세종이 "경이 사사로 좋아하는 사람을 임용한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허조는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그 사람이 현명한 인재[賢才 현재]라면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은 피혐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인재를 쓰는 일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의심받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이러한 원칙 있는 인사가 세종 시대를 '인재가 왕성한[人才極盛 인재극성] 시대'로 만든 힘이었다(세종실록 14년 2월 7일).
허조의 그런 소신 인사 뒤에는 세종의 신뢰가 있었다. 세종은 “사람을 쓸 때는 임금이 모두 몸소 골라 관직에 앉혀야 한다”는 사헌부 관리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 한 몸으로 사람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모두 살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인사 담당자가 정밀하게 선발하기를 기다린 뒤, 내가 다시 살펴 제수할 수밖에 없다.” 세종은 모든 인사를 직접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인재를 가려내는 일은 인사 전문가에게 맡기고, 임금은 그 판단을 존중한 뒤 최종 책임을 지는 체계를 선택했다. 허조는 원칙에 따라 사람을 추천했고, 세종은 그 전문성과 재량을 믿어 주었다. 전문가의 안목과 최고지도자의 신뢰가 맞물릴 때 비로소 좋은 인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세종 정부의 건설적 비판자(gadfly)로서 허조의 모습이다. 그는 어떻게 모두가 한목소리를 낼 때에도 홀로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었을까.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 불린 허조는 안숭선·조말생 등이 새로운 정책을 제안할 때마다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위험과 허점을 집요하게 지적했다. 그는 정책의 밝은 면보다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최악의 상황을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이었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다"(세종실록 15년 10월 23일)라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문제점을 보완한 뒤에야 정책을 시행했다.
1433년(세종 15) 파저강 정벌 논의가 대표적이다. 허조는 군량 부족과 장마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까지 상정하며 줄곧 반대했다. 토벌이 최종 결정된 뒤에도 그는 다시 아뢰었다. "밤새 거듭 생각해 보니 성상께서 이미 큰일을 정하셨는데도 신이 의심하는 말을 거듭 올리는 것은 황공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고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안팎이 서로 다른 것이 되오니, 감히 중지하시기를 울며 청합니다."(세종실록 15년 1월 18일)
결국 그의 반대는 정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을 미리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회의실에서 '집단사고(groupthink)'를 막는 역할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종이 이런 허조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말하게 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허조가 제기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보완한 뒤에야 정책을 시행했다. 허조의 직언은 결정을 늦춘 것이 아니라, 정책의 오류를 줄이고 실행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허조는 어떤 계기로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관료가 되었을까. 나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는 1425년 종묘 제례에서 일어난 '계단 추락 사고'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식을 주관하던 허조는 술잔을 올리고 내려오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모두가 그의 실수를 탓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세종의 첫마디는 달랐다. "허 판서, 다치지 않았는가." 세종은 책임을 묻기보다 사람을 먼저 살폈다. 이어 "계단을 넓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 실수한 사람을 탓하기보다 사고를 만든 구조를 고친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세종의 태도는 허조에게 왕에 대한 깊은 신뢰를 심어 주었을 것이다. 이후 허조는 평생 "국가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自以 國家之事 爲己任 자이 국가지사 위기임]"는 평가를 받는다.
둘째는 태종의 신임이었다. 태종은 허조를 "나의 주석(柱石)"이자 "참된 재상[眞宰相]"이라 부르며 깊이 신뢰했다. 그러나 허조 역시 처음부터 강직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김종남 사건과 목인해 사건을 겪으며 그는 아무리 간쟁이 중요해도 군주의 뜻을 거스르기만 해서는 국정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점은 수령고소금지법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허조는 끝까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왕이 최종 결정을 내리자 "내 뜻과는 다르지만 거의 중용을 얻었다[庶可得中]"며 승복했다. 직언의 목적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일이 더 바르게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셋째는 세종이 즉위 초부터 보여 준 국정 운영 원칙이었다. 세종은 1419년 허조와의 논의에서 "인재를 얻었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나면 맡기지 말라[任則勿疑 疑則勿任 임즉물의 의즉물임]"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신을 선발했으면 책임을 맡겨 성과를 내게 해야 하며, 임금이 자잘한 일까지 모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허조의 생각은 이후 세종 국정 운영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허조가 세종시대에 남긴 가장 큰 공은 두 가지였다. 인재를 선발하고 보호하는 인재경영의 기틀을 세운 것과, 건설적 비판자로서 정책의 허점을 미리 짚고 대안을 모색하게 한 것이다. ‘초뷰카(hyper VUCA) 시대’인 오늘날 이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최고경영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기업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많은 실패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방향만 바라보는 '집단사고'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허조가 맡았던 '집단착각 깨뜨리기'는 오늘날 모든 조직이 다시 주목해야 할 리더십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소개한 덴마크의 사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 정부와 공직자들은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에 침묵하지 않았다. "반유대인 조치가 시행되면 즉시 사임하겠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이러한 원칙 있는 저항은 나치 군인들마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7,800여 명의 덴마크 유대인 가운데 독일군에 체포된 사람은 477명에 그쳤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원칙에 기초한 저항에 맞닥뜨리자 그들의 강인성은 태양 아래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고 평가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직언이 조직의 분위기를 바꾸고, 조직의 분위기가 다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세종이 허조를 곁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리더는 언제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다른 생각을 말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조직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반대 의견이 많은 때가 아니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업과 공공조직에서도 진정한 경쟁력은 뛰어난 전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칙에 따라 사람을 뽑고, 다른 의견을 끝까지 들으며, 직언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조직만이 큰 실패를 피하고 오래 살아남는다. 좋은 리더는 정답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의견을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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