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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세종이야기 제6호] 밝으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리더십, 세종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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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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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하고 화평하되, 말은 간결하면서도 과묵하게 하라.’
새로 부임한 수령에게 다산 정약용은 과묵하되 간결해야 한고 강조했다. 목민 리더십의 성패가 절반 이상 부임 초기에 결정되기에, 절대 뽐내거나 거들먹거려서는 안 되며, “오직 엄하고 온화해야하고 마치 말 못하는 사람처럼처신하라고 말했다(목민심서부임6계행편). 이는 부임 초기의 리더의 언행이 조직 전체에 깊게 각인되고, 이후 업무 수행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꿰뚫어본 말이다.

22세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어땠을까? 그에 앞서 그의 즉위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1418년 음력 810일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11) 근정전에 나아가 즉위 교서를 반포했다. 그런데 새 임금이 경복궁 법궁인 근정전에서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고, 창덕궁에 있는 부왕 태종에게 수레를 타고 가 인사를 올리며, 종묘에 사람을 보내 즉위 사실을 고한 것은 조선 왕조 들어 세종이 처음이었다. 그 이전에는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거나(태조 이성계), 부왕의 축하를 받지 못한 채 국정을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정종과 태종의 경우). 모두의 축하를 받는 즉위식은 세종 이후에도 드물었다. 새 지도자의 정통성에 흠결이 있을 경우, 즉위 초반부터 적잖은 장애물에 직면하게 된다. 세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정통성 차원에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었던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당당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세종의 즉위 제일성 분석

811일에 반포한 즉위교서는 세종 정부의 국정 운영 이념과 향후 정책 기조를 가늠할 수 있는 정치 선언문이다.

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시고, 부왕 전하 태종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셨고, 다시 내가 그것을 이어받게 되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부왕 태종께서 이뤄놓으신 법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라. 〔…〕 , 나는 왕위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고자 한다[施仁發政 시인발정].” (세종실록 즉위년 811)

여기서 세종은 세 가지를 밝혔다. 첫째, 앞으로 큰 변화가 없으라는 점을 선포했다. 왕권이 바뀔 때마다 생기는 급격한 변화나 정치보복에 대한 우려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존의 법도와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둘째, 화합의 차원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태조와 태종 시대에 이러저러한 잘못으로 죄명에 오른 이들에게 대사면을 단행한 것이다.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며 신민 전체를 아우르려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셋째, 시인발정(施仁發政), 즉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겠다고 밝혔다. 여기의 시인발정맹자발정시인(發政施仁)”을 뒤집은 표현이다. 법령을 먼저 내리고(發政) 백성에게 따르라 하기보다, 먼저 백성의 입장에서 어짊을 베풀고(施仁) 그 위에 정치를 세우겠다는 의미다. 세종은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기보다, 백성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듣고 그에 기반해 제도와 법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정치의 출발을 위로부터의 명령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공감으로 시작하겠다는 이 다짐은, 이후 세종의 국정운영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 되었다.

이 말은 세종이 정치를 시작하는 기본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인 백성에게 어짊과 덕을 먼저 베푸는 것으로부터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처음부터 법령과 제도를 만든 뒤 이리로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백성의 입장에 서서, 즉 시인(施仁)의 자세로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은 뒤, 그에 맞춰 법과 제도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도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고, 정치와 제도 역시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의논하자로 말문을 연 세종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맨 처음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즉위한 지 사흘째 되는 1418812, 세종은 도승지 하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들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세종실록 즉위년 812)

이 자리에서 세종은 먼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누구보다 총명하던 그가 인물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서 하는 말이 그러니 함께 의논하자였다. 인사권조차 독단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들과 함께 논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먼저 듣고 함께 의논하여 방향을 정하겠다는 세종의 시인발정의 리더십은 실제 국정운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를 최대한 낮추어, 다른 이들의 의견과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게 했다. 신하들의 작은 잘못을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이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고쳐 나가게 했다. 하지만 왕의 기대와 달리 초창기 어전회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침묵하거나 대세 따르기가 지배적이었다. 엄혹한 태종 시대를 겪은 관료들에게 거리낌 없는 직언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상황을 지나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재위 7년째인 142512, 세종은 지금으로 말하면 () 아직 과감한 말로 과인의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면서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내 달라고 당부했다(세종실록 7128). 말하는 방법과 관련해 그는 절실한 말, 즉 국가와 백성에게 꼭 필요한 말이라면 강직한 태도로 말해 달라고 강조했다. 솔직하고 날카로운 비판과 의견 개진을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이렇게 눈치 보기에 익숙한 어전회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 나갔을까?

침묵과 대세추종의 회의 분위기 바꾸기

첫째, 세종은 회의 시간에 신하들의 말을 일단 수긍하고 경청한 뒤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왕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신하라도, 세종은 먼저 그 뜻이 좋다거나 네 말이 아름답다며 그들의 말을 인정하고 칭찬했다(세종실록 11221). 말하는 이가 무안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한 것이다. 그런 뒤 왕의 생각을 관철시켜야 할 때는 좋은 말을 듣고도 거절함은 임금의 도리가 아닐 듯하다. 하지만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세종실록 25621)고 말해 신하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했다. 가령, 형조참판 고약해가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 행사인 강무(講武)를 강력히 반대했을 때, 세종은 먼저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라며 그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고약해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세종은 그러나 강무는 유희가 아니라 국방을 위함이라면서 설득했다(세종실록 14124). 이처럼 신하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만으로도 반대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수령고소금지법 논쟁에서 허조도 그런 사례다(세종실록 151024).

둘째, 세종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화를 낸 경우는 총 21회로, 월평균 0.06회에 불과했다. 이는 뒤의 성종(월평균 0.04)보다는 약간 높지만, 종이나 영조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빈도다(도표 참조). 화내는 내용을 살펴보면, 태종은 언관의 불손한 말이나 세자 양녕의 불순종 등 주로 개인적 관계에서 화를 냈다. 반면 세종은 사신 접대 문제(세종실록 12103), 여진족의 변경 침입(세종실록 14129), 거짓말하는 관리(세종실록 141026), 환관에 의한 의사소통 왜곡(세종실록 2268), 언관들의 지나친 불교 배척(세종실록 28109) 등 공적인 사안에 대해 화를 냈다. 물론 세종도 태종처럼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 등 종친 문제로 화를 낸 적이 있다(세종실록 28220).146e65304a3826a001b9a573f7ad6646_1752333861_6669.jpg

셋째, 세종은 회의가 단순한 토론에 그치지 않고 좋은 결론을 내도록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경연에서 신하들의 고전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자 그는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함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세종실록 141222)고 하며, 회의가 현학 경쟁에 머물지 않도록 이끌었다. 특히 양녕대군 문제나 불교 비판처럼 민생과 거리가 먼 정치공세 이념 논쟁은 아예 어전회의 의제로 올라오지 못하게 차단하곤 했다. 또한 군신 간 대결 국면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신하가 왕에게 세 번 간해서 듣지 아니하면 벼슬을 버리고 떠난다”(三諫不聽則去)논어구절을 인용해 국면 전환을 시도하곤 했다(세종실록 6216; 23년 윤1129).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회의에 참여시켜 토론의 예방적 효과를 거두게 함도 세종 회의의 중요한 기법의 하나였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허조가 좋은 예다. 허조는 일 만들기 좋아하는안숭선, 조말생 등이 여러 정책 제안을 내놓으면 그 제안에 내재한 문제점을 꼼꼼히 지적했다. 그는 깐깐하고 철저하게 정책의 음지, 즉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최악의 경우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야”(세종실록 151023)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늘 끝까지 그의 의견을 경청했고 문제점을 해결한 뒤에야 정책을 시행했다.


흔히 똑부형’, 즉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보다, 똑똑하지만 게을러 보이는 똑게형 리더가 더 낫다고들 한다. 뛰어난 지도자는 아는 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일지라도 부하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해내도록 기다린다는 뜻이다. 최고 지도자가 지나치게 유능한 체하면 작은 일은 잘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성원들은 점차 소극적으로 변하고 결국 지도자 혼자만 일하게 된다세종은 비유컨대 똑게형 리더였다. 취임 직후 그는 과인이 인물을 잘 모른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어전회의에서는 주제를 제시하는 데 그치고 되도록 발언을 삼갔다. 특히 즉위 초기에 말을 극도로 아꼈다. 장중하고 화평하되 간결한 언어로 온 나라의 목소리가 궁궐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했다. 상왕 태종이 서거한 이후 그가 보여준 단호하고도 유연한 국정 추진력은 바로 이렇게 준비되었다. 세종은 밝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明而用晦]’, 그리하여 진짜로 밝아지는[爲大明]’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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