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는 함정(艦艇) 건조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첨단 이지스함과 3천톤급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전투함인 판옥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다만 일본의 전선인 아다케부네와 세키부네보다 전투력이 좋았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정유재란 당시의 판옥선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얼마나 큰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었을까? 판옥선의 크기는 18세기 말 정조 시대 <각선도본>의 전선(戰船)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이보다 작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대략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타고 호령했을 가장 큰 판옥선(上船)은 길이가 20m 정도(19.7~21.2m)였고, 예하 장수들이 타는 일반적인 판옥선은 16m 정도(15.2~16.6m)였다고 본다. 지금도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 가면 함선과 거북선을 건조했던 선소(船所)가 남아있는데, 이 선소의 형태가 선거(Dock) 내에서 함선을 건조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선소의 규모에서 만들 수 있는 함선의 크기는 대략 20m 내외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판옥선은 한 달 내에 빨리 만들 수 있는 구조인가? 동양 선박은 서양 선박과 달리 용골(Keel)과 늑골(Frame)이 없다. 선수와 선미를 길게 관통하는 15m 이상의 긴 목재(용골)가 필요치 않다. 또 판옥선은 2층 갑판선 구조의 소나무로 만든 평저선이다. 고하도 인근 도서의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밑판(본판)과 옆판(삼판)으로 기본 구조를 잡고, 여기에 횡강력 유지를 위한 가룡목과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깔아 ‘평선’의 구조를 이룬다. 이 평선 위에 방패판을 설치하고 선루를 만들어 이를 ‘상장’이라고 한다. 상장에는 양현(좌현과 우현)과 이물(선수)에 여장(성가퀴)을 설치하고, 격군과 타공이 위치하여 노를 젓고 방향타를 조종한다. 상장 위에 또 포판을 깔아 ‘청판(廳板)’을 설치한다. 청판에는 두 개의 돛대와 누각(장대 곧 지휘소), 깃대를 설치한다. 곧 판옥선은 기본 평선 구조에 상장과 청판을 얹어 2층 갑판선의 구조로 건조한다. 전쟁이 한창인 때에 솜씨 좋은 목수들이 힘을 모아 한 달이면 능히 만들 수 있는 선체 구조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얼마나 많은 판옥선을 만들어 전력 증강을 하였을까? 무술년(1598)에 절이도해전과 왜교성전투가 있었고, 마지막 노량해전에 참가했던 병력은 대략 7천여 명에 달했다. 그렇다면 판옥선 1척당 130명의 인원(격군과 사부 등)이 타고 있다고 볼 때 노량해전에 투입된 함선은 대략 50여 척의 판옥선과 협선의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외에 대략 40여 척의 함선이 이 시기에 신속하게 대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명확한 신념과 임진년 거북선을 만들었던 나대용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나대용은 임진년 사천해전에서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모두 참전하였다고 전한다. 고로 이 시기에 나대용은 이순신의 지시로 새로운 판옥선 건조에 매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왜란이 끝난 후 나대용은 판옥선이 모두 60척이라고 조정에 보고한 바도 있다. 이처럼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했다. 적선과 부딪쳐 능히 당파(撞破)할 수 있었고, 해상에서의 빠른 진형 변화로 전술적 운용성이 뛰어났으며, 화포에 의한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함선이었다. 이 판옥선에서 통제사와 수사, 첨사와 만호 등이 장대에서 지휘하고, 청판에서는 군관들의 지시로 총통을 운용하는 화포장과 포수, 활을 쏘는 사부 등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 아래 상장에서는 격군장(사공)의 구령에 맞춰 격군(노꾼)들이 2인 1조가 되어 좌우로 나뉘어 힘차게 노를 저었으며, 타공이 배의 방향타(키)를 운용하였다. 맨 아래 격실에는 지휘관과 선원들의 침실과 각종 창고 등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