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되기 전의 세종의 ‘노란 떡잎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크게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다르다는 뜻의 이 속담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집 근처 숲의 도토리를 살펴보았다. 떡잎, 즉 씨앗 속에 있는 배(胚)에서 가장 처음 나온 잎은 파랬으나 참나무로 자라지 못한 게 아주 많았다. 반면 떡잎은 노랬으나 나뭇잎 아래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란 도토리도 있었다. 도토리가 떨어진 위치와 발아 환경이 떡잎 못지않게 중요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표현에 따르면, 도토리의 잠재태(潛在態)가 같더라도 운동 내지 작용이 다르면 전혀 다른 현실태(現實態)로 나타났다(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도토리 떡잎을 관찰하면서 세종 이도의 어린 시절 기록을 살펴보았다. 부왕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세종 이도가 총명하고 민첩한[聰敏]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배우기를 좋아하여[好學]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고 했다(태종실록 18/06/03). 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세종 이도는 우선 머리가 좋고 공부를 좋아했다. 취미이자 특기가 공부였다. 동작이 재빠르지는 않고 오히려 의젓한[莊重] 사람이었다.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보이기 쉬운 경박함이 그에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종 이도의 떡잎은 파랬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의 떡잎이 노랬던 부분도 있었다. 세종 이도가 태어난 1397년 4월 10일부터 왕위에 오른 1418년 8월 10일까지 22여 년간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약 40여 건 기사가 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준다. 우선 그는 일러바치기 잘하는 왕자였다. 《태종실록》에 외삼촌 민무회로부터 안 좋은 말을 들은 충녕은 즉시 부왕 태종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그 일로 외갓집이 풍비박산 되고 말았다(태종실록 15/04/09). 충녕의 이런 모습에 실망한 세자 양녕은 동생을 꺼렸으며, 자신의 애첩인 어리도 동생 충녕의 고자질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태종실록 18/05/11). 충녕은 또한 잘난 체하는 사람이었다. 태종 재위 16년째인 1416년 한 여름에 태종은 상왕인 정종을 모시고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이때 신하들은 당시 지식경쟁의 상징이었던 시구 잇기[聯句]를 경쟁적으로 벌였다. 이때 충녕은 그 어렵다는 《서경》의 한 구절을 들어 한껏 학문을 뽐냈다. 물론 그 자리엔 세자 양녕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종은 양녕을 돌아보면서 “왜 너는 학문이 이만 못하냐?”(태종실록16/07/18)고 꾸짖었다. 이때 충녕의 나이 이미 열 아홉 살이었고, 또 누구보다 영리했던 그가 자신의 이런 행동이 형을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라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설날 즈음에 새 옷을 차려입고 동생들에게 “어떠냐?”고 묻는 큰형 양녕을 향해 이도는 “마음 바로잡는 게 먼저입니다. 용모는 그 다음”(태종실록 16/1/9)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때문에 양녕은 동생 이도를 ‘범생이’ 취급을 하면서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며 따돌림을 하였다(태종실록 16/9/19). 세종 이도는 비만하고 편식하는 아이였다. “주상(세종)은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못한다”는 부왕 태종의 지적이 그 점을 보여준다(세종실록 22/06/29).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忠寧不猛]”라는 형 세자의 말과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언급에서 보듯이, 그는 운동하기를 싫어했다(태종실록 16/02/09; 세종실록 00/10/9). 그러다보니 뚱뚱한 몸이 되었다. “비중(肥重)하다”거나 살이 쪄서 “몸이 무겁다[體重]”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세종실록 00/10/9; 1/2/20). 한마디로 왕 되기 전의 세종 이도는 고자질쟁이요, 잘난 체하는 왕자였고, 운동 부족으로 과체중(過體重)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외삼촌들의 대화나 큰형의 여자‘어리’를 부왕에게 일러바친 일은 ‘리더다움’의 측면에서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는 네 살 무렵부터 ‘우두머리를 다투는 마음[爭長之心]’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형 양녕과 양녕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견제 대상이었다(태종실록 9/9/4). 물론 정치세계에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부왕 태종과 이도 자신이 가장 경계했던 참소(讒訴) 정치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세종을 변화시킨 ‘작용’ 두 가지 그러면, 이처럼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인간이었던 세종 이도가 어떻게 그런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좌절의 아픔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고쳐나갈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외삼촌들의 위협과 형의 견제, 그리고 부모 불화를 참고 이겨내는 품성(character)이 그로 하여금 역경을 극복하게 하였다. 애덤 그랜트에 따르면, 어릴 적에 신동이라 불렸던 사람들이 큰 성과를 거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을 더 똑똑하게 만들려고 애쓰며, 특히 새로운 것을 흡수하는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새로운 지식과 기량, 그리고 다른 관점을 찾아서 자기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 따분하고 반복적인 긴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데, 이 때 중요한 게 품성이다. 그에 따르면 품성은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주도력, 친화력, 자제력, 결의 등 학습 가능한 행동유형’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탁월함을 향해 진전하게 만든다(애덤 그랜트 2024, <숨은 잠재력> 22쪽). 세종은 이미 일곱 살 무렵 양녕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치적 야망을 꺾어야 했다. 이후 형 양녕과 외삼촌 등의 견제와 협박 속에서 자라야 했다. 열 살 때인 1407년(태종7년) 9월 외삼촌 민무구 등은 세자 이외의 왕자들을 모두 나무의 곁가지를 자르듯 제거해버려야[剪除] 한다고 협박했었다. 자신의 ‘기댈 언덕’이었던 세 살 위의 누나 경안공주가 사망하는가 하면(18세), 막내 동생이 홍역으로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21세). 한마디로 7세부터 21세에 즉위하기까지 15년간 세종 이도가 맞닥뜨려야 했던 도전과 시련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이 도전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한 힘이 주도력과 친화력이었다. 예컨대 세종 이도가 16세 되는 1413년(태종13년) 12월에 태종은 이도에게 “너는 따로 할 일이 없으니 편안히 즐기기나[安享而已] 하여라”면서 글과 그림, 꽃과 돌, 그리고 악기를 갖춰주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을 두루 비치함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이도는 예기(藝技) 방면에도 탁월했고, 거문고를 양녕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세종 이도는 경사(經史) 공부는 물론이고, 예능까지도 ‘즐기면서’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다. 악기를 매개로 형 양녕과 매우 화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높은 친화력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이도가 훌륭한 리더로 성장하게 된 데는 품성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활발한 의사소통 능력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과 기품이 비슷한 세 살 위 누나(경안공주)와 대화를 자주 했다. 누나는 동생 이도의 덕성과 기량을 칭찬하곤 했는데, 그 점이 그로 하여금 ‘기댈 언덕’이 되었다. 그는 또한 아버지 태종이 마련하는 학술적 모임 자리나, 여행 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언하곤 했다. 아버지의 칭찬이 그를 더욱 성장하게 했다. 러시아의 교육심리학자 비고츠키에 따르면, 어린이가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행위(사회적 말하기)는 자기 존재감을 높이고 나아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비고츠키 2011, <생각과 말> 108-109쪽). 세종 이도의 경우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독서하고 홀로 숙고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청형 대화’에 익숙했는데, 뛰어난 두 스승, 즉 고전을 엄선해서 가르쳐준 스승 이수(李隨)와 그와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한 생활동반형 스승 김토(金土)를 통해 배우고 또 토론하는 지도자다움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다움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어린 시절 세종 이도는 도전과 좌절을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에게 독서와 토론은 살벌한 정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부왕 태종을 정점으로 하여 회오리치는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려는 큰 형 양녕에게 '여자와 사냥'이 필요했듯이, 어린 이도에게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책이었다. 부왕 태종은 종종 이도를 가리켜 호학불권(好學不倦), 즉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한 번도 싫증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세종 이도의 품성을 잘 보여준다. 국왕에게 꼭 필요한 여러 요소를 배워야 한다면, 그 배우는 과정을 ‘즐기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다(지도자다움의 필요조건으로서 품성). 지도자다움은 음악이나 스포츠, 혹은 학문 분야와 달리, 몇 가지 뛰어난 기량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재들의 마음을 얻는 게 지도자의 제일 조건이다. 세종 이도의 즉위 제일성이 ‘내가 잘 모른다’였던 사실에서 보듯이, 그는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겸양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낮춤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좋은 의견을 낼 수 있게 했다.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는(세종실록 즉위년/8/12) 즉위 첫마디에서 보듯이, 그는 빼어난 인재들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는데 탁월했다. 인재들이 좋은 의견을 내면 위임하기를 잘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의 최종 책임자는 바로 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말하자면 세종에게 지도자다움의 두 번째 요소는 경청과 위임이었다(지도자다움의 충분조건으로서 경청과 인재 위임). 이렇듯, 지도자의 잠재력은 기량이 아니라 태도에서 형성하고 또 발현된다. 그러면 세종 이도의 그런 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본다. (끝) |